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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어제 오늘 내일

이경한 2017-09-07 00:00:00

비틀즈의 어제 오늘 내일
▲ 출처 = 위키피디아 커먼즈

영국 리버풀에서 1960년 결성된 비틀즈는 존 레넌, 폴 맥카트니, 조지 해리슨, 그리고 링고 스타 4인으로 구성된 록밴드다. '비틀즈 마니아(Beatlemania)'라는 열광적인 팬들의 힘을 얻어 북미와 영국 록밴드로 큰 성공을 거뒀다. 대중문화에 관한 비틀즈의 영향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957년 존 레넌은 리버풀의 교외 지역인 울튼에서 아마추어 밴드 쿼리맨의 스키플 공연을 하던 중 폴 맥카트니를 만났다. 존 레넌은 그 후 맥카트니를 밴드에 스카우트했고 그들은 함께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 말에 폴 맥카트니는 존 레논을 설득해 조지 해리슨을 밴드에 스카우트했고 이듬해인 1958년 그들은 쿼리맨이라는 밴드 이름을 조니와 문도그(Johnny and the Moondogs)로 변경했다.

1960년 말, 존 레논은 그가 다니던 예술 학교에서 만난 스투 서트클리프(Stu Sutcliffe)를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영입했다. 같은 해, 그들은 밴드명을 실버 비틀즈(Silver Beetles, 은색 딱정벌레)로 바꿨으나 몇달 후, 실버를 빼고 비틀즈의 스펠링을 바꿔 더 비틀즈(The Beatles)로 확정했다.

토미 무어(Tommy Moore)는 피트 베스트(Peter Best)가 1960년 8월 드러머로 영입되기 전까지 비틀즈의 드러머 였다. 베스트가 합류한 후, 투어 레퍼토리를 강화한 밴드는 함부르크 맥주 하우스로 첫 투어를 떠났다. 1961년 4월이었고 서트클리프가 떠난 베이시스트 자리를 맥카트니가 맡았다.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은 비틀즈가 독일 카벤에서 공연하는 동안 그들을 발견했고 그 후, 밴드의 매니저가 됐다. 그는 비틀즈의 레코드 계약을 따내려했으나 유럽의 거의 모든 레이블이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비틀즈는 결국 1962년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Martin) EMI의 Parlophone 레이블에 서명했다. 같은 해, 그룹의 첫 번째 레코팅 세션이 끝나기 전 탈퇴를 요구받은 베스트를 대신해 링고 스타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이를 통해 클래식 비틀즈의 라인업이 확고해졌다. 엡스타인은 또한, 검은 가죽 자켓, 단단한 청바지, 칼라가 없는 회색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정장 및 가벼운 양성 애착의 이발로 퐁파두르(Pompadours) 등의 의상으로 비틀즈의 스타일을 담당했다.

4명의 멤버 모두 보컬에 기여했지만 레논과 맥카트니의 노래와 작곡 사이의 파트너십이 두드러졌다. 1962년 9월 비틀즈는 두 성공적인 싱글 앨범 '러브 미 두(Love Me Do)'와 '피에스 아이 러브유(P.S. I Love You)'를 통해 UK Top20 히트를 기록했고 이듬해 1962년 2월 데뷔앨범 '플리즈 플리즈 미(Please Please Me)'로 30주 연속 영국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63년 그들은 영국 투어를 통해 '비틀마니아(Beatlemania)'라고 불리는 열렬한 팬층을 확보하며 최고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 해 비틀즈는 또한 위드 더 비틀즈(Withe the Beatles)'를 통해 다시 21주 동안 1위를 차지하며 무려 51주 연속으로 1위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다.

비틀즈의 어제 오늘 내일
▲ 출처 = 위키피디아

그들은 '캔 낫 바이 미 러브(Can not Buy Me Love)'로 첫 번째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올랐으며 1964년 2월 미국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해 당시 최고 인기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Ed Sullivan Show)'에 출연하며 그 유명한 '영국 음악의 미국 침공' 흔히 말하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 시작됐다.

1964에도 '어 하드 데이스 나이트(A HardDay's Night)'와 '비틀즈 포 세일(Beatles for Sale)'로 28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그 이듬해 그들은 '헬프(Help)'라는 앨범에 수록된 '예스터데이(Yesterday)'라는 곳을 발표했다. 이 곡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따라 불린 곳이 됐다.

1965년 10월 영국 여왕은 비틀즈에게 MBE(영국국가공로훈장)을 수여했으며 버킹검 궁전에서 세레모니를 가졌다.

1965년 '러버 소울(Rubber Soul)'가 함께 비틀즈의 열망은 팝이나 사랑 노래만이 아닌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그들의 음악은 성장해 자유로운 음악 형식과 편곡을 통해 서정성과 진보적 가사를 보여줬다.

비틀즈의 어제 오늘 내일
▲ 출처 = 플리커

이 앨범은 종종 지금까지 만들어진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간주된다.

1966년 존 레논은 밴드의 인기에 대해 "기독교 신앙은 사라질 것입니다. 오그라들고 사라질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인기가 많습니다"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논란에도 불구하고 밴드는 계속해서 히트곡을 만들어 내며 인기를 견고히 했다.

최종 투어가 끝난 1967년 비틀즈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발표했다. '가상 밴드'라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해 만든 이 작품은 그들의 일탈과 균열 적인 방향을 잘 보여주는 앨범이다. 그들의 균열은 예술적이었다. 이 당시 비틀즈의 매니저 앱스타인은 런던에서 갑작스런러운죽음을 맞이했고 레논은 일본의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Ono Yoko)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69년 '렛잇비(Let It Be)'앨범 레코드 세션에서 비틀즈는 급격히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고 스튜디오 빌딩의 옥상에서 즉흥 콘서트를 가졌다. 이는 비틀즈 멤버들이 함께한 마지막 연주가 됐다.

1970년 렛잇비는 결국 밴드의 마지막 앨범으로 출시되었고 그 후, 레논과 맥카트니를 비록한 각 멤버들은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비틀즈는 빠르게 성공을 거둔 예술가이자 혁신가였다. 음악의 취향에 상관없이 비틀즈는 상업음악계에서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문화 예술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거대한 팝 문화의 영향으로, 그들의 음악적 유산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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