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내 욕심일까, 네 바람일까
가정을 해보자.
내가 기관차 운전사인데 두 갈래 길 중 하나로 기차를 몰아야 한다.
한 쪽 길에는 4~5명의 모르는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쪽 길에는 나와 잘 아는 사람 혹은 내 가족이 혼자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기차가 오는 것을 모르고, 안다 해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때, 나는 모르는 4명의 목숨을 살릴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는 한 사람을 살릴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내게는, 노령견을 병원에 데려간다는 것이 이 결정만큼이나 쉽지 않은 것이었다.
주변의 노령견 견주들이 꽤 많아서 그들을 통해 지난 몇 년간 간접적으로 각종 질병과 병원비, 노령견에게 드는 부대 사항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한 선배 오빠는 결혼자금으로 모았던 2,000 만원을 14년간 함께 살았던 요크셔테리어의 수술비와 병원비로 모두 쏟아 부었고, 단골 음식점 주인 아주머니는 10살짜리, 13살짜리 두 애견의 병수발 때문에 가게를 대리인에게 맡기고 몇 달을 이 병원 저 병원 동분서주 했다.
이들을 통해 애견 병원도 2차 병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온갖 검사에 약과 수술, 입원과 처치 등에 한 달에 수십에서 수백까지 비용이 소요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슬펐던 것은 대부분의 애견 질병이 완쾌에 대한 정의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분명 수의사들은 다른 얘기를 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고 들은 애견들의 노화에 의한 질병은 병의 확산 속도를 더디게 만들거나 더 나빠지지 않게 조치하는 것이 최선인 듯 했다. 관절이나 종양 제거 등 눈에 띄는 질병의 치료는 좀 다른 경우의 이야기지만 소위 내과 계통 질병은 대부분 이후 징후에 대한 확실성이 없이 그저 주인의 안타까움으로 유지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보리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이 심히 망설여지기도 했다.
딱히 뚜렷하게 아픈 곳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혹여 병원에 데리고 가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특히 어떤 처치가 필요한 경우 마취에 대한 부담이 컸다. 워낙 기관지가 안 좋은 녀석이라 마취를 견딜 수 있을까도 걱정이었고, 보리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그냥 남은 몇 년의 여생을 수술하고 회복하며 힘들게 하는 걸 원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물어보지 못했으니 어쩌면 이건 내 노후관과도 무관하지 않은 판단이었으리라.
예전부터 우리 식구들끼리는 한 가지 합의를 한 사항이 있었다.
반려견이건 우리 식구이건 단순 생명 유지를 위한 무언가는 하지 말자는 것.
엄마 아빠도 만약 나중에 호흡기를 달고 유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7일 이상 달아 놓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보리도 그 관점으로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보리의 병원행을 고민하게 한 사항이 생겼다.
바로 이빨이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움직임에는 무리가 없고 식욕도 그 어떤 강아지보다 왕성한 녀석인데 이빨이 부실해서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 살펴보니 몇 개의 이빨에 치석이 심했고 그 위로 잇몸도 나빠져 있었다. 이대로 계속 두자니 냄새도 냄새지만 먹는 즐거움 하나 남은 녀석의 행복을 지원해주지 못하는 것도 같고, 그렇다고 마취해서 치석제거를 해주자니 마취가 두려웠다. 결국 남은 행복을 위해 모험을 할 것이냐 그냥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참고 살 것이냐를 판단해야 했다.
며칠 고민한 끝에 위험하면 다시 돌아오리라 마음먹고 보리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피 검사, 심전도 검사를 거쳐 마취가 가능하다는 소견을 들었고, 최소한의 마취만을 한 채 스케일링을 진행했다. 일곱개의 이빨을 뽑았고 잇몸 치료를 받고 난 후 보리는 말 그래도 "앓던 이 빠져 시원한" 개가 되었다.
예전처럼 오도독 오도독 사료도 잘 씹어먹고 구취도 사라졌으며 가끔 아파서 끙끙 거리던 모습도 없어졌다.
왜 진작 병원을 데려가지 않았을까 후회될 정도로 보리는 잘 먹고 잘 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노령견인 보리를 병원에 데려가는 것이 망설여질 때가 있다.
처치를 통해서 이렇게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언제든 기꺼이 선택해서 실행하겠지만 내가 내 욕심으로 뭔가 무리하게 끌고 나갈 일이 생길까봐 두렵다.
내가 사랑하는 내 개니까, 이 만큼 더 버텨줘.
내가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숨만 쉬어줘.
혹 내가 이렇게 보리를 힘들게 할까봐 나는 여전히 매일 보리를 보며 내 기준을 고민한다.
어떤 것이 보리를 위한 것일까.
내 욕심일까 아니면 보리도 바라는 것일까.
아마 끝나지 않을 고민이겠지만 그래도 해본다.
보리의 행복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