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뭘 보고 듣니, 우리 보리?
"보리야."
불러본다.
반응이 없다.
방석 집 밖으로 축 늘어트린 머리. 미동도 하지 않는 발.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본다. 코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니 그제야 안심이 된다. 다시 한 번 불러본다.
"보리야."
그제야 게슴츠레 뜨는 눈. 초점이 흐리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머리 위에 얹는다. 흠칫 놀라지만 곧 그게 내 손이라는 것을 알고는 조용히 기대온다.
나이가 들면서 보리는 급격하게 시력을 잃었다. 너무 까맣고 투명해서 '우리 보리 눈은 흑진주 같아!' 라고 자랑했었는데 어느새 흰 구슬처럼 변해버렸다. 빛을 비추어도 반응이 없고 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멍하다.
처음에 보리의 눈이 혼탁해졌을 때 병원을 데리고 갔다. 두 군데를 갔었고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수술이나 약물로 좋아질 수 있는 게 아닌 노화에 의한 시력 상실. 마침 그 즈음 녹내장 수술을 하면서 안구를 적출한 지인의 반려견 이야기를 들었던 지라 두 눈이 제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며 보리를 집으로 데려왔었다.
문제는 집에 온 다음부터 점점 더 시력을 잃어가는 보리였다. 시력이 나빠지면 후각이나 청력이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해줄거라 기대했는데 노령견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바람이었다.
눈이 나빠지면서 보리는 귀도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고 후각도 무뎌졌다. 결국 한 평 남짓한 공간도 무서워하며 살금살금 발을 내딛고, 부딪히다 화들짝 놀라며 깽! 소리를 지르는 일이 잦아졌다. 화장실도 찾아가지 못하고 코앞에 있는 밥도 이리 쿵 저리 쿵 박아가며 먹는 나날.
그런 보리를 보며 우리 식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점점 슬퍼졌다.
원래 금빛에 가까운 비단 같은 털을 가졌던 보리의 털이 듬성듬성 하얗게 바래가고 작은 소리에도 쫑긋거리며 예민하게 움직였던 두 귀가 장식품처럼 축 쳐진 채 움직이지 않으면서 보리는 점점 더 소심해지고 괴팍해져갔다.
처음 알았다.
개도 늙으면 노여움을 타고 괴팍해진다는 것을.
유난히 소심하고 겁 많고 순종적이었던 보리는 오감을 잃어가면서 조금씩 괴팍한 성격이 되었다. 한 번도 그러지 않던 녀석이 으르렁 거리기도 하고, 목욕을 할라치면 온 힘을 다해 싫다는 티를 냈다.
마치, 아주 오랜 시간 욕망을 참고 개인감정을 누른 채 늙어왔던 여린 여자가 늙어 치매가 오자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내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보리는 지난 세월 참아왔던 반항을 뒤늦게 하기 시작했다.
요즘도 새벽 다섯 시 반이면 보리는 울기 시작한다. 아주 길고 서럽게. 마치 "이것들아. 이 늙은이 아침 안주냐! 아직도 자빠져 자냐! 아이고 서러워라. 늙으면 죽어야지. 밥도 못 얻어먹고 이게 뭐하고 사는 거냐!" 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저녁 여섯 시면 또 어김없이 같은 울음을 운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나 아직 살아있다 이놈들아!" 하듯.
처음에는 그런 보리의 칭얼거림이 아팠다.
난생 처음 자신의 의견을 내기 시작한 보리였고 그게 먹을 것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이 아팠다. 너무 뒤늦게 의사 표현을 하는 녀석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게 사랑을 구하는 것도, 애교를 부리는 것도 아닌 생존을 위한 칭얼거림이라는 것이 마음에 무겁게 닻을 내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 아낌없이 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녀석의 마음 깊숙한 곳에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는 것일까 봐. 좋은 기억은 다 잊고 그저 아프고 슬펐던 나날에 대한 기억만 남아 저렇게 서럽게 밥을 구하는 것일까 봐 많이 아팠다.
그래서 그때 마다 보리를 쓰다듬고 안아주기 시작했다. 치매 기운도 있어 매일 뭔가를 잊고 사는 보리에게 매일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하루치의 기억을 잃을 때, 나는 보리가 아주 옛날 혼자 덜덜 떨었을 병원의 차가운 케이지 기억을 잃어줬으면 좋겠다.
또 하루치의 기억을 잃을 때, 부디 담뱃불로 지져지고 발로 채였던 그 나쁜 남자 임보인의 기억을 잃어주었으면 좋겠다.
하루의 기억을 또 잃어야 한다면 입양되었다 파양 되고 다시 작은 케이지로 돌아와 울부짖었던 그 날의 기억을 잃기를 바란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을 지금부터 담아주었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귀에 담고, 꼭 안아주는 서툰 손길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게 늙어가는 보리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느끼는 세상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