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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리 작가의 Pet Story] 나이듦이 흐르다_늙어가는 개와 함께 하는 시간

최주연 2015-07-27 00:00:00

#1/4 보리의 시간은 천천히 간다.

'지오, 어쩌면 내게 거는 주문일 거야'의 고영리 작가에게는 지오 외에도 보리라는 반려견이 한 마리 더 있다. 보리는 한참의 시간을 떠돌다 작가의 가족이 된 유기견으로 이제 또 다시 무지개 너머로 떠날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작가가 보내온 노령견과의 생활, 그리고 한번은 마주하게 될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고영리 작가의 Pet Story] 나이듦이 흐르다_늙어가는 개와 함께 하는 시간
▲ 고영리 작가

#1/4 보리의 시간은 천천히 간다.

"마음이 아파서 못 살겠다."

보리 집을 치우던 엄마가 혼잣말처럼, 하지만 나보고 들으라는 듯 툭 내 뱉는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리의 공간을 치울 때마다 엄마는 늙어가는 보리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를 너무나도 힘겨워 한다. 나도, 아빠도 치우기는 하지만 엄마의 꼼꼼함과 철저함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결국 닦고 말리고 새 배변판을 깔아주는 건 어쩔 수 없이 80% 이상이 엄마 몫이다.

엄마는 얼마 전부터 무릎이 좋지 않아 걷는 것 자체를 힘겨워 하고 있다. 몸이 약해질수록 마음은 더 예민해져가고 쉽게 부서진다. 안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낡아가는 자신의 육체 때문에 민감해져 있는 엄마의 감정 도화선을 건드리는 것은 다름아닌 보리이다.

[고영리 작가의 Pet Story] 나이듦이 흐르다_늙어가는 개와 함께 하는 시간

보리는 올해 11~13살 추정, 할머니 푸들이다.

처음에 데려왔을 때는 3~5살 사이였고 나와 8년 정도를 살았으니 열 살은 훌쩍 넘은 노령견이다. 어렸을 때부터 데리고 와서 꼼꼼하게 돌보았던 코카스파니엘 지오와는 다르게 보리는 처음부터 이런저런 질병을 가지고 있었다.

오자마자 슬개골 수술을 해주었고, 아마도 유기의 원인이었을 만성적인 기관지 질환도 문제였다. 2년을 넘게 병원 케이지에 갇혀 있었던 친구라 산책 나가는 걸 세상 그 무엇보다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습한 바람이 불거나 찬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해대는 통에 산책도 자주 데리고 나가지 못했다. 많아 봐야 한 달에 한두 번. 모두 합쳐봐야 백 번이 안 되는 산책이 8년간 보리가 누린 바깥 세계의 전부였다.

그렇게 화양연화같이 짧은, 보리의 시간이 흐른 후 보리는 어느새 노령견이 되었다.

귀도 들리지 않고 눈도 보이지 않아서 킁킁 거리다가 여기저기 쿵쿵 부딪히며 우뚝 서버리는 그런 노령견.

어쩔 수 없이 보리가 살던 작은 거실 공간의 일부를 담장으로 막고 그 안에 보리만의 공간을 꾸며주었다. 처음에는 애를 어떻게 가두어 놓냐며 반대했던 부모님들도 오히려 보이지 않는데 광활한 공간보다는 자기가 알고 컨트롤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낫다는 말을 납득해 주셨다.

[고영리 작가의 Pet Story] 나이듦이 흐르다_늙어가는 개와 함께 하는 시간

너른 거실에서 작은 공간으로 옮긴 보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방석에서 하루 24시간 중 23시간을 보낸다. 깨워도 별 반응 없이 그저 잠만 잔다.

하루 세 번, 약해진 소화기관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먹지 못하는지라 조금씩 주는 세 번의 밥 시간에만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밥을 먹고는 다시 곧장 집으로 들어가 눕는다.

마치, 방석에 처음부터 딸려온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보리가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순간은 똥오줌을 쌀 때이다. 천성적으로 깔끔한데 어렸을 때 배변에 관해 엄청 혼난 기억이 있었는지 보리는 한 번도 내가 볼 때 배변을 한 적이 없다. 배변과 동시에 칭찬과 간식을 무한히 날려서 내가 볼 때만 똥오줌을 싸고 자랑스레 꼬리치는 지오와는 달리 보리는 내가 옆에 있으면 열 시간이고 열 두 시간이고 배변을 참는다. 그리고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그 때 한강처럼, 산처럼 싸곤 했다.

그랬던 보리가 늙고 나니 배변도 가리지 못한다.

한 번은 어디서 배변판은 깨끗한데 너무 심하게 구린내가 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보리가 앉은 자리에서 왕창 싸놓고 그 위에 그냥 누워 자고 있었던 것이다. 보리를 들어 올리며 나도 모르게 아이고 이놈아! 라고 한 소리를 했다. 부랴부랴 애를 목욕시키고 새 집을 깔아서 넣어줬는데 아, 보리가 내 쪽을 보지 않는 것이다 .

쓰윽 등을 돌리고 구석에 머리를 디밀어 박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미안해 엄마. 그런데 내 맘대로 되지 않아. 늙어서 그런가봐. 나도 이런 내가 싫어.' 라는 듯. 그렇게 보리는 어르고 달래고 쓰다듬어도 몇 시간을 등 돌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식구는 모두 '우리도 늙으면'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하루하루 조금씩 더 노인이 되어가고 있는 부모님은 보리를 볼 때마다 남일 같지 않다며 우울해 하신다.

[고영리 작가의 Pet Story] 나이듦이 흐르다_늙어가는 개와 함께 하는 시간

아직은 발랄한 5세 아이 같은 8살 지오와는 다른 보리의 시간은 이렇게 천천히 우리 식구들 사이를 흐르며 묘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늙은 개와 함께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 나의 미래를 투영해 볼 대상과 함께 산다는 것과 같다. 하얗게 바랜 보리의 털에서 꿈꾸는 듯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먼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오래 미동도 없는 보리의 눈동자에서 나는 나이듦의 끝을 보고 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다.

보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녀석도 추억을 곱씹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기억을 가장 좋아할까.

그 마음을 담아 오늘도 보리에게 묻는다.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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